국경을 넘어 보편적 기억으로 미국 평화의 소녀상

 2013년 7월 30일,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계 미국인 기억 운동가들이 캘리포니아 글렌데일의 시립 도서관 앞 공원에 '평화의 소녀상'을 세웠다. 이것은 미국에 설치된 첫 소녀상이다.


그러나 소녀상은 설립 직후 논란에 휩싸였다. 데이브 위버 글렌데일 시장은 일본 극우 방송사 사쿠라TV와의 인터뷰에서 "무료로 소녀상을 세우고 평화로운 작은 마을에 국제적 평탄한 물결을 일으켰다"고 비판했다.


시의원 5명 중 소녀상 건립 문제가 시의회 안건으로 올라왔을 때 반대했던 사람은 데이브 위버뿐이어서 그의 인터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영향은 컸다. 지난 10월 7일 인터뷰가 방송된 직후 위버 시장의 비역사적이고 무책임한 발언이 한국 언론에서 비판의 대상이 됐다.


개막식은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주도한 윤석원 미국 캘리포니아 한·미 포럼 회장이 맡았다. 그는 시의회가 공식 절차를 거쳐 결정한 사안에 대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비판하고, 위안부의 실상을 알려주는 각종 자료들을 "일본군의 위안부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고백한 자신에게 선물하겠다고 나섰다.


닛케이 민권 구제 단체도 비판에 동참했다. 이 모임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의 행정명령에 의해 강제 연행돼 인권과 시민권을 박탈당한 일본계 미국인들의 명예와 배상을 회복하기 위해 마련됐다.


일본계 미국인들이 겪은 억울함을 기억하면서 소수민족을 희생양으로 만드는 인종차별적 편견이나 박해에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들이 글렌데일 평화의 소녀상 건립 운동을 지지하며 위안부에 대한 일본 정부의 사과와 보상, 명예회복 등을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2015년 12월 28일 한·일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를 발표하자 NCRR은 단호한 비판 성명을 발표했고, 이듬해 1월 5일 글렌데일 소녀상 앞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참여했다.


NCRR의 움직임은 답답한 한일 간 민족주의적 갈등을 넘어 국경을 넘는 기억의 연대가 피해자 인권 원칙 아래 어떻게 가능한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보인다.


이 경우 글렌데일 시의원 자레 시난얀에게 가장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일본 정부의 강력한 로비와 보수적인 일본계 미국인 단체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평화의 소녀상 건립을 지지하고 홍보했다.


소녀상 건립 직전인 2013년 4월 참의원에 당선된 지 얼마 안 된 30대 정치 신인이 자신에게 특별한 이해관계가 없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에 상처를 입을 위험을 무릅쓴 것은 드문 일이다. 더군다나 소녀상 제막식에 참석해 연설도 해주시니 더욱 궁금하다.


NCRR이 발행하는 일간지 라푸심포에 실린 시나얀의 제막연설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할아버지가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의 생존자임을 밝힌 뒤, 그는 운 좋게도 희생자들의 고통과 두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었다.


"갈등을 해결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범죄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아르메니아인들과 나의 할아버지는 끔찍한 범죄의 희생자였다. … … 지금까지 그 사실에 대한 사과와 인정이 없었기 때문에 그 상처는 깊고 희미하다."


어린 시절부터 친숙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에 대한 그의 기억은 그에게 일본군의 위안부에 대한 감정적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의 연설에서 언급했듯이 시나얀은 아르메니아계 미국인이다. 1973년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서 태어나 15세 때인 1988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정치, 역사, 법률을 공부하고 민사소송 변호사가 되었다. 글렌데일에서 시의원과 시장을 역임할 정도로 30대 초반 정착에 성공한 이민자다.


그는 UCLA에서 정치학과 역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한국계 미국인들과 개인적인 교류를 했을지도 모른다. 글렌데일 시장 재임 시절인 2014년 11월에는 한국계 미국인이 만든 최대 은행인 비즈니스뱅크오브센터(BBCN) 서울사무소 개소까지 초청받았다. 그는 친구보다 더 많은 사업 관계를 맺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평화의 소녀상 건립에 대한 지지를 시나얀의 개인 가족사에 돌려주는 방식으로 절반의 진실만을 얻는다. 오히려 왜 글렌데일이냐고 물어봐야 할 것이다.


비록 글렌데일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에 도달하지 못했지만, 해외에 있는 아르메니아인 거주지 중 최대 규모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인구 20만 명도 안 되는 이 작은 도시에서는 아르메니아인의 40% 이상이 아르메니아인이다. 이 막강한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지원이 없었다면 글렌데일 한인 1만 2천 명만이 가진 힘으로 평화의 동상을 세우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시나얀의 연설에서 분명히 드러났듯이,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의 기억이 글렌데일 아르메니아인들을 일본군 위안부의 고통에 민감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흥미로운 움직임은 시나얀에 이어 글렌데일의 시장을 이어받은 또 다른 아르메니아 시장인 바르탄 가르페티안이다. 주LA 한국총영사관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그는 시장 재직 시절인 2017년 6월 한국 총영사관을 방문해 글렌데일과 한국 도시의 자매결연을 논의했다.


서로 다른 피해자들의 연대

또 다른 흥미로운 점. 글렌데일 시립도서관에 새로 개관한 갤러리 리플렉스 스페이스에서 평화의 소녀상을 앞에 두고 열리고 있는 특별전들이다. 2017년 5월 열린 박물관 개관전 '기억의 풍경'은 아르메니아 대량학살 당시 공식 역사와 생존자들의 증언의 관계를 묻는 특별전이었다. 아르메니아인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강한 도시로서, 이 주제는 이해할 수 있다.


다만 두 번째 전시 주제가 일본군 내 위안부의 침묵과 대화에 대한 예술적 성찰이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아르메니아인 대량학살 생존자 사진을 계속 찍어온 한국인 큐레이터 모니카 혜연준과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부부 아라 오샤간이 전시 큐레이터로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은 예사롭지 않다.


이 시 갤러리에는 현대 사진과 희귀 자료를 섞어 홀로코스트의 다양한 내러티브를 살펴보는 '나는 누구인가: 홀로코스트의 내러티브'와 노예 무역부터 오늘날까지 미국의 노예제도를 그린 '노예의 사후세계'가 전시되어 있다. 그는 차례차례 기획을 하면서도 예술을 통해 비극적인 역사를 재현하고 기억하는 문제를 꾸준히 추구했다.


현재 열리고 있는 '미국-멕시코 국경 협상' 전시도 궁금증을 높인다. 현대사진, 희귀자료, 음성녹음, 강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돼 있어 친하게 지내면 당장이라도 달려보고 싶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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