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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폴란드는 1980년 내내 세계적인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그해 5월 광주에서 드러난 권력의 만행에 '민주주의의 봄'이 짓밟히자 한반도는 겨울공화국으로 얼어붙었다. 광부 출신인 김명수 시인이 연대노조를 응원하며 한국사회의 민주주의 희망을 노래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1980년 겨울, 스웨덴 아카데미는 망명 중인 폴란드 시인 체스와프 미뇨시가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발표했다. 실제 사회주의의 검열과 억압에서 벗어나 미국으로 도피한 미와시에게 노벨문학상이 수여된 것은 대체로 정치적이었다. 미묘한 시점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기 때문에 미와시의 문학 업적에 깜짝 놀랐습니다.
잠시 후 나는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깨달았다. 1996년, 크라쿠프에서 안식년을 보내고 있을 때, 저는 우연히 미와쉬의 두 시를 읽었습니다. 시 "Biedny chrzecicijanin patrzyna getto"와 "Campo dei Fiori"는 시이다.
<게토를 바라보는 가난한 기독교인들>이 전하는 시적 이미지는 극도로 괴괴하다. '죽은 자의 폐에 벌집을 짓는' 벌, '검은 뼈' 위에 세워진 개미들의 둥지, 피가 넘쳐나는 '붉은 강', 머리카락 하나에도 깊게 타오르는 시체 타는 냄새 등을 묘사한 시들은 입에 담기조차 두려울 정도다. 나는 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 하지만, 실제로 종말론적인 다른 구절이 있다. '제2의 예수님'이 폴란드 기독교인인 나를 유태인 살해의 공범으로 심판할 구절은 말 그대로 폴란드 종말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폴란드에서, 2차 세계대전은 58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을 죽였는데, 이것은 전체 2,400만 인구의 20%가 넘는 것이다. 특히 엘리트들의 희생이 컸다. 대학을 졸업한 폴란드인의 3분의 1 가까이가 살해됐고 성직자, 교수, 변호사, 의사, 군 장교 등 엘리트 절반 이상이 몰살됐다. 백분율로 따지면 폴란드가 가장 큰 희생자였다.
그러나 미워시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에 이 시를 썼고, 폴란드 가톨릭교도들을 유대인 살해의 공범으로 지목했다.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숨기고 이스라엘의 야드 바셈에 의해 '정의로운 민족'으로 선정된 미와시의 역사를 떠올리며 그의 문학적인 비난은 '왜?'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Miwash의 또 다른 시, Fiori Square는 더 가슴 아프다. 이단 때문에 피오리에서 화형을 당하는 르네상스 인문주의자 조르다노 브루노와 고통 속에서도 일상을 즐기는 로마 시민들에 대한 묘사로 시작한다. 다음으로 영화는 바르샤바 게토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도 불구하고 크라신스키 광장에서 회전목마를 타며 일요일의 일상을 즐기는 바르샤바 시민들의 모습과 기관총과 총소리가 따가워지는 모습을 그린다.
홀로 죽어가는 조르다노 브루노와 벽 너머 바르샤바 게토 유대인들의 모습이 담긴 시적 콜라주가 애처롭다.
나치 폭력의 방관자
1987년 크라쿠프의 문학평론가 얀 바오인스키의 수필로 다시 태어나 역사, 철학, 도덕 논쟁의 중심이 되었다. 브원스키는 미워시의 시 제목을 패러디한 그의 에세이 비드니 폴라시 파트르자나 게토에서 홀로코스트에 대한 폴란드인들의 책임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가 증언하듯이, 나치 통치의 가장 잔인한 측면은 희생자들이 파괴되기 전의 비인간화였다. 나치가 인간의 생존본능을 담보로 행사한 엄청난 폭력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도 자신 있게 폴을 손가락질하거나 그가 방관자라고 비난할 수 없다. 이것은 폴란드인들이 도덕적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로 브원스키는 그의 동료 폴란드인들을 법적인 의미에서 "우승자"가 아니라 종교적 양심에 근거한 "그레체코"로 지칭했다. '나치 통치와 같은 가혹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으니 자랑스럽다'는 위엄 있는 말보다, 자신에게 더 시급한 질문은 '내가 정말 궁핍한 유대인 이웃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가'일 것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위의 예를 들어 '수치의 징벌적 역할'을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 이면에는 자신을 도덕적 존엄성이 아닌 '관련된 주체'로 부끄럽게 여기는 감수성이 피비린내 나는 과거를 정직하게 직시할 수 있는 힘이라는 깨달음이 깔려 있다. 폴란드의 과거사 논란에 당사자라는 역사적 입장은 바우만에게 이런 깨달음을 준 것으로 보인다.
홀로코스트의 공범들
폴은 때때로 수동적인 방관자 이상이었다. 나치 점령기 폴란드에서는 숨은 유대인을 갈취하거나 길을 잃은 이웃의 재산을 탐내는 일이 흔했고, 전문 유대인 사냥꾼(smalcownic)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일반 범죄자들의 거리 경호를 담당했던 폴란드 '파란 경찰'이 존재했다는 것은 폴란드가 개인 차원을 넘어 조직적으로 협력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부 폴란드인이 홀로코스트의 공범이라는 사실은 희생국으로서의 폴란드의 역사적 이미지에 재앙이었다. 파시즘과 용감하게 싸우는 사회주의 전사들의 나라라는 폴란드의 이미지도 흔들릴 것이다.
이들에게 홀로코스트에 협력했던 과거는 자기 비판적 성찰의 대상이 아니라 침묵으로 일관하며 기억을 지운 것이다. 실제 사회주의의 기억문화에서 홀로코스트는 나치를 지지한 서구 자본가들의 책임일 뿐 공산주의 빨치산들의 반파시스트 투쟁을 강조하는 다소 거추장스러운 주제였다.
폴란드 공산당의 경우 유대인 피해자들이 철저히 국유화됐다. 당의 공식 역사학에서, 유대인 후손의 3백만 폴란드인들은 유대인으로 분류되었고, 단지 폴란드인들의 희생자로만 여겨졌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은 폴란드와 독일 사이의 투쟁으로 전락했고, 유대인들의 고통과 희생은 폴란드에 대한 공식적인 기억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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