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의 지지가 승패를 가른다 태조 왕건

 그것은 지배와 정복으로 점철된 후삼국 시대였을까?

907년에 통일된 당나라가 붕괴되면서, 중국 본토에는 50년에서 70년 밖에 지속되지 않은 15개의 단명한 왕조가 번갈아 나타났다. 이 혼란기는 960년 송나라가 건국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 한반도 정세는 중국 본토와 다를 바 없었다.


신라 진성여왕(865~897년, 재위 887~897년) 때 왕조에 반기를 든 지방 세력들의 봉기와 농민 반란으로 세금 징수가 불가능해졌다. 견훤(甄won, 867년 ~ 936년, 재위 900년 ~ 935년)과 신라 왕실의 궁예(69 8, 869년 ~ 918년, 재위 901년 ~ 918년)가 각각 후백제(900년)와 후고구려(901년 ~ 901년)를 정복하였다. 건국 이후 삼국분단의 시대가 펼쳐진다. 그때부터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할 때까지 한반도는 약 50년 동안 참혹한 전쟁을 계속했다.


반면 왕건·견훤 등 영웅적 군주의 지략과 힘(군사력)이 이들 역사서술에서 강조되기 때문에 지성과 권력을 바탕으로 한 지배와 정복이 마치 당시 지배하던 도덕법과 정의인 것처럼 묘사된다. 일반인뿐 아니라 연구자들도 그렇게 여겼는데 그런 측면이 강조되는 경우가 많았다. 삼국통일이 되기까지 50년 동안 한반도는 거대한 전쟁터였고, 이 영웅적인 군주들이 전쟁의 주인공들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다.


군사력만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었는가?

하지만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립시다. 당시 통일전쟁의 향방을 결정짓는 열쇠는 어느 왕조가 갖고 있었을까? 기록에 나오는 빈도로만 보아 견훤의 후백제, 궁예, 왕건의 고려로 보인다. 그러나 전쟁의 승패의 열쇠를 쥔 나라는 군사력이 약하고 전쟁 능력조차 없는 신라였다. 왜 그럴까?


조선 후기의 역사학자 안정복 (1712년 ~ 1791년)은 그의 스승 익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고려 태조의 부상에 대해 역사서에는 "태봉(太 ()의 여러 장수들이 왕건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나는 이것에 대해 의심이 간다. 이 시기에, 신라의 정통 왕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러나 궁예는 반란을 일으켰고, 왕건은 집단이었다. 그래서 왕건은 그저 도둑들일 뿐이다.


안정복은 왕건, 궁예, 견훤 등 당시의 영웅적 군주들은 모두 신라 왕실에 반기를 든 도둑들이었다고 했다.


이 생각 속에는 군주제의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자리잡고 있다. 정통 군주를 받들고 따라야 한다는 존중 군주주의의 원칙은 세계와 국민을 자비(사랑)와 정의(의)로 다스리는 군주제에 뿌리를 두고 있다. 다른 한쪽에는 세계를 힘과 힘으로 통일시켜 국민을 다스리는 지배의 법칙(覇道治 of),),),),),),),


존왕의 정치이념을 지배와 정복으로 편안한 날이 없는 전쟁시대를 거치는 이념으로 본 안정복의 이야기가 과연 사실일까. 그러나 견훤과 왕건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힘과 지략만으로는 통일 전쟁의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승자와 패자를 가르는 결정적 요인은 통일 후 어느 나라를 지향해야 할지에 대한 정치적 이념이었다. 그것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전쟁 중 그들 두 사람 사이의 편지이다. 먼저, 그 편지의 배경을 살펴봅시다.


927년(태조 10) 9월, 견훤은 경상북도 문경 지역의 근품성을 공격하여 경주와 가까운 지금의 영천 지역인 굴부(高府)까지 진격하였다. 압력 등과 같은 강제 시위 절망한 신라는 고려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견훤은 왕건의 군대가 도착하기 전에 경주를 점령하고 왕비를 강탈하고 왕(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으로 교체하는 충격적인 행동을 취한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구출했다. 지금의 대구 팔공산인 공산(公山)의 동수(東水) 전투에서 오른팔 신성겸(申成,)을 잃고 군사가 전멸할 뻔했는데, 혼자서 간신히 탈출할 수 있을 정도로 노장 왕건에게는 이 전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사건이었다. 반면 이 전투에서 승리한 견훤은 후삼국전쟁에서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을 것이다.

참혹한 전쟁의 시기를 견제하고 통제하는데 인의와 의를 강조하는 왕도 정부가 역할을 했다는 점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유교적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왕도의 정부가 지략과 권력이 지배하는 지배와 정복의 시기에 맞지 않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와중에서 이러한 이념들이 정통성을 지닌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왕건을 내세운 혁명가들도 궁예가 궁예 축출의 명분으로 명예왕정에 입각한 왕실 자본주의를 부정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 명의 한족이 갈라져 한 무리의 도둑들이 다투었는데, 이제 궁예왕은 용맹을 발휘하여 큰소리로 명하여 마침내 도둑들을 물리치고 한반도 대부분과 함께 나라를 세우고 이미 수도를 세웠다. 20년 이상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은 끝내지 못하고, 함부로 만행을 저지르고, 자신의 의지에 과도한 처벌을 가하고, 아내와 아이들을 죽이고, 사제들까지 죽이고, 백성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원수처럼 미워했다. 게())와 주(周)의 폐해는 이보다 더 클 수 없다. 어둠을 없애고 빛을 만드는 것이 세상의 명분입니다.


- 『고려사』 권92 홍유서

왕건을 왕으로 추대했던 주모자 중 한 명인 홍유(洪 hong)도 궁예를 몰아낸 이유 중 하나가 궁예가 소녀와 주왕처럼 폭력적인 정치를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궁예를 몰아낸 왕건을 걸과 주, 즉 은의 당왕과 주 무왕을 몰아낸 은주(殷州)에 비유하기도 했다. 견훤에게 보낸 편지에서 왕건이 견훤을 소녀와 주씨에 비유한 사실이 떠오른다. 왕건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또한 존 왕의 정치적 이념을 공유했다.


군사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현실에서도 신라를 정통 왕조로 인정하는 왕도의 군주주의와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쟁의 와중에도 신라를 정통으로 여기는 민심을 얻어야 최후의 승자가 된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왕건은 이미 그런 새로운 트렌드를 읽고 있었다. 그는 여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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