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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책꽂이에만 8㎞에 달하는 나치 관련 문서를 꼼꼼히 읽고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나치 정부조직, 독일군 조직과 지휘체계, 친위대와 제국보안국, 폴란드 총독부 등 점령지 모든 지휘체계의 정확한 도표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기록자료를 종합적이고 엄격하게 분석한 책이다. 사람들을 압도하다
라울 힐베리는 한마디로 홀로코스트 실증연구의 대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노년에 불규칙한 에세이를 썼다. 그것은 "나는 거기에 없었다"라고 쓰여 있었다. 흥미로운 제목의 이 에세이에서, 그는 매우 예상치 못한 가슴 아픈 질문을 던진다. "아우슈비츠 뒤에 각주를 다는 것은 똑같이 야만적인 것이 아닌가?" 이 질문은 분명히 테오도르 아도르노의 질문을 패러디한 것이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가 가능할까?"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의 문학적 재현을 시로 문제 삼았다면, 힐베르크는 직접 경험 없이 문학 자료만으로 아우슈비츠를 역사적으로 재현해 온 자신의 작품을 반성했다. 힐베르크의 질문은 홀로코스트 연구가 어떻게 변화하고 있는지를 한 마디로 암시한다는 점에서 그가 뛰어난 역사학자임을 보여주기도 한다.
힐베리는 '홀로코스트 유럽 유대인의 파괴'에서 미군이 포착한 나치 문서와 뉘른베르크 나치 전범재판 기록 등 기록물을 주요 자료로 활용했다. 그러나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1961년 이스라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이 열리면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이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홀로코스트 연구는 기록 자료에서 증언으로 점차 전환되기 시작했다.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증인으로 소환되어 나치 범죄를 입증하기보다는 그들의 고통을 전달하려 했다.
전설적인 할리우드 촬영 기사 레오 휴위츠가 이끄는 촬영 기사 팀은 재판을 전 세계에 생중계하기 위해 법정 곳곳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했다. 역사를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문제는 곧 논란이 될 것이다. 라이브 TV 방송 덕분에, 아이히만 재판은 시각적 표현이 문자적 표현보다 과거의 역사를 재현하는 데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특히 1970년대에 이 교훈은 영화, TV 드라마, 사진, 만화 같은 대중매체가 역사 서술의 주요 형태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
실증주의와 홀로코스트의 역사
시각적 표현의 문제는 차치하고, 힐베르크의 에세이는 더 중요한 문제를 제기했다. 문제는 특정 역사적 사건의 공문서와 그 사건을 경험한 목격자들의 목소리 중 어느 쪽이 역사적 진정성을 더 갖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특히 증인 중 한 명인 예히엘 드누르가 심문 도중 실신해 들것에 실려나가면서 비극의 주인공에 대한 대중들의 공감이 더 커졌다. 그 재판은 드라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비극의 주인공인 목격자들의 등장은 재판에 대한 국제 여론을 변화시켰다. 나치의 범죄행위는 반인륜적 범죄이기 때문에 아이히만을 이스라엘 법원이 아닌 국제법정에서 재판해야 한다는 칼 야스퍼스와 마틴 부버의 비판적인 목소리는 보는 이들의 가슴을 울리는 목격자들의 영상에 묻혀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이히만의 증거를 입증하기에 충분했다.uil.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디언 하우스너 이스라엘 검사가 인터뷰 대상자를 법정에 세우고 증인을 선정한 이유는 TV로 재판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감정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시청자들은 목격자들에게 관심을 집중시켰다. 아이히만은 더 이상 재판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기억의 트라우마를 딛고 가슴속 깊이 묻어둔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한 목격자들이 시선을 붙잡기 시작했다. 아이히만 재판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자신의 증언을 믿지 않거나 무관심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해방됐다는 점에서 기억의 관점에서 의미가 크다. 희생자들의 연설이 열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들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나 생존자가 되는 것은 더 이상 숨기거나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었다. 이는 역사 연구에 '감정적 전환'이라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감정의 변화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을 다룬 연구가 축적되면서 기존의 실증주의적 방법론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됐다. 나아가 문서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의 폭력으로부터 증인을 보호할 수 있는 장치를 어떻게 마련할지 고민한 결과였다.
기억전쟁에서 실증주의는 밑바닥부터의 기억이 과장되고 부정확하며 정치적으로 왜곡되고 심지어 조작된다는 인상을 주기 위해 종종 행해진다. 가해자와 권력자가 문서증거와 역사서술을 독차지한 상황에서 피해자들은 경험과 목소리만 가진 경우가 많았다.
증거 서류가 없는 상황에서 증언은 종종 유일한 권한의 원천이다. 하지만, 증언은 불완전하고, 감정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때로는 부정확하다. 따라서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사람들의 풀뿌리 기억은 기록적 실증주의 앞에 상대적으로 약하다.
실증주의로 무장한 부정론자들이 증인을 심문하듯 압박하고, 증언과 증언의 모순을 끄집어내고, 증언의 역사적 가치를 훼손하는 태도가 이쯤에서 자주 발견된다. '거짓말', '혐오스러운 조작', '진실 왜곡', '사실 조작', '전혀 조작에 기반을 둔 값싼 소설', '각주 달린 소설', '수백 개의 거짓말'과 같은 언어 폭력은 역사적 비극의 생존자-증거'라는 이름으로 가해지는 것은 정당하다.
실증주의의 서술은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사람들에 의해 처음 사용되었다.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수행했다면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이 있을 텐데 그런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하늘에서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한 홀로코스트에 대한 모든 증언은 거짓이 되거나 이야기가 된다.
아태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 체제를 부정했던 위안부 부정론자들의 논리도 비슷하다. 위안부 부인론자 중 한 명인 후지오카 노부카츠는 "일본군이 한국 여성을 강제로 납치했다면 질서는 분명히 유지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문서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식으로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자들은 가해자의 범죄 기록이 없어 사실이 아니라며 군내 위안부 증언도 위증이라고 몰아붙인다. 또는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논의를 돌연 인간사냥 등 강제추방으로 제한하고, 강제추방을 명령하는 군부의 공식 지시가 없어 피해자들을 거짓 증언으로 고발한다. 이들 부정론자들은 실증주의를 일본 제국과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성폭력의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 위한 전략으로 삼고 있다.
데니에 후지오카는 군 위안부가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지 못해 문서로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의 증언은 더욱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는 "그 할머니들이 정말로 위안부였다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묻는다.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증거' 그 자체가 아니라 '증거의 정치'이다.
부정론의 실증주의는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증언에 담긴 기억의 진위를 훼손하기 위해 사용된다. 음모론이 난무하는 이유다. 위안부의 증언은 돈을 위한 거짓말이고, 그 이면에는 '국내외 항일 세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음모론을 입증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실증주의가 사실 확인보다는 증언의 진위를 훼손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실증주의는 사실과 무관하다.
'부정의 실증주의'는 홀로코스트 부정이나 일본군 위안부 부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난징 대학살에 대한 잘 알려진 부정 외에도, 베트남 기근에 대한 부정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 거대한 기근은 아시아 태평양 전쟁 동안 일본의 통치하에 있던 1945년에 베트남에서 일어났다. 200만 명 기아론은 1945년 9월 2일 호찌민이 발표한 베트남 민주공화국 독립선언서에서 처음 제기되었다. 이에 대한 일본 주류층의 반응은 베트남 전체 인구의 15%를 차지하는 기아율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번 기근사건과 관련한 서류가 거의 없어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더구나 베트남에서도 이 사건은 민족해방투쟁의 영웅적 기억 속에 파묻혀 형언할 수 없는 기억 속에 오랫동안 억눌려 있었다. 이에 대한 일본의 공식 반응은 실증주의로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부정의 실증주의는 결국 베트남 희생자들에 대한 기억을 부정하고 일본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든다. 그것은 기억력에 관한 사실들의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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