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대학 유학생은 어떻게 고단한 생활을 버텼을까

 제국대학 유학생 중에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학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많았다. 역사학자 문일평은 조선일보 논설고문을 지냈고, 1934년 '조선일보'라는 제목이 인쇄된 탁상달력에 중국어로 된 일기를 남겼다.


일기에 '며느리 금반지를 35원에 판다'고 담담하게 적어 교토대 법대에 재학 중인 아들 문동표에게 보냈고, 등록금 명목으로 '50원 대출증서를 판다'고 적었다. 문동표에게는 그것을 준 아내와 돈을 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가 있었기 때문에, 문동표는 가장 행복한 유학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가족의 지원 없이 오로지 자신의 노동과 열렬한 유학 열정만으로 유학 생활을 버텨내야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비날론'의 산업화를 통해 북한 인민복 문제를 해결한 북한 과학자상 수상자 리승기도 그 중 한 명이다. 귀족 출신 담양의 몰락, 장고, 마쓰야마고, 교토제국대학 공업화학과를 진학한 그의 학문적 여정은 말 그대로 고달팠다.


고교 3년 동안 유학 중이던 조선의 대지주 아들의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었다. 그는 일본인 급우들에게 점심을 거르는 것에 대해 궁금해하며 배가 아프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자존심을 지켰다. 고등학교를 어렵게 졸업한 뒤 다카쓰기 화학 연구소에서 근무하며 한국인 최초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교토 대학 공학부 조교수가 됐다.


해방 후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학장을 지냈으며, 김일성의 적극적인 초청으로 6·25전쟁 때 제자들을 이끌고 북으로 갔다. 그 후 북한 과학계의 지도자를 지냈으며, 현재는 평양의 애국지사묘에 안장되었다.


이승기보다 더 파란만장한 고교생활을 한 이들이 있다. 총독부 군수를 지냈고 해방 후 상무보건농업부 차관을 지낸 도쿄 베테랑 임문환씨도 회고록에서 어려운 고교 생활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16세 때 일본 유학 의향을 뒤로하고 도시샤 중학교와 제6고등학교에 진학하여 "닭장, 보조교사, 공장 노동자와 인력거 운전사, 화장실 청소부와 제초기, 가정교사"로 일했다. 1932년, 그는 도쿄 대학 법학부의 정치학부에 입학했다.


고심 끝에 그는 고등학생들을 지원했던 공제과를 방문한다. 공제회는 임문환을 서점 이와나미 시게오 대표에게 소개한다. 도쿄예술대학 철학과 출신 이와나미 시게오는 이와나미 문고, 잡지 '세계' '문예춘추' 등을 발간하며 일본 근현대 지식인들의 역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와나미는 임문환을 축복보다는 노동의 대가를 치르는 방식으로 지지했다.


그는 임문환에게 오후 5시부터 9시까지 서점 소매점에서 일하게 하고 23엔의 월급과 무료 저녁 식사를 제공했다. 그는 방학 동안 가마쿠라에 있는 별장을 공부의 장으로 열었고, 임문환이 졸업하자 양복을 선물하였다. 학업을 마친 임문환은 고등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총독부에 유능한 관리로 입문하였다. 진보 성향의 이와나미가 임문환의 행보를 어떻게 봤을까.


상대적으로 가난한 제국대학 학생들

이 두 사람만이 임페리얼 대학교를 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은 아니었다. 교토 제국 대학의 236명의 정식 졸업생 외에, 졸업하지 않은 190명의 외국인 학생들이 있었다. 등록했지만 졸업하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들. 이 가운데 도쿄제국대학 출신인 조재홍,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김린이 등 이념 사건에 연루돼 자퇴한 사례도 있었다. 그러나, 더 많은 중퇴자들은 아마도 경제적 박탈감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참고할 만한 조사가 남아 있다. 일본 문부과학성은 1938년에 대규모 학생 생활 조사를 실시하였다. 총 6만여 명, 제국대학 학생만 1만여 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표본조사였다. 이 조사에 따르면 제국대학 학생들은 다른 사립대학, 공립대학, 관립대학에 비해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다. 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선총독부는 우수한 한국 유학생을 선발하여 일본 유학을 가는 관비 유학생 제도를 운영하였다. <죽음의 찬가>의 가수이자 김우진과의 열애로 유명한 윤심덕 역시 정식 유학생으로 조선총독부의 지원을 받아 도쿄음악원을 졸업했다. 재능은 있지만 가난한 식민지 청년들은 정부 지원 학생 제도를 통해 자신들의 꿈을 추구할 수 있었다. 제국대학 졸업생 중에는 정부출연 외국인 유학생도 있었다.


먼저, 도쿄 제국 대학의 졸업생들을 살펴봅시다. 교토에서 제3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 제국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였고, 후에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였다. 수학자 최윤식도 정식 유학생이다. 히로시마 고등학교 교사와 도쿄 제국대학 수학과를 졸업한 후, 서울대학교 문과대학 학장과 한국수학회 초대 회장을 역임하였다. 최윤식은 이승만의 평생 집권을 위한 이른바 '둥글둥글' 개헌안 과정에서 자유당의 논리에 전문가들의 권한을 빌려줘 씻을 수 없는 오명을 남겼다.


도쿄제국대학 농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사육사 우장춘은 조선총독부 관비 유학생 가운데 특별한 경우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이는 그가 그에게 총독 장학금을 지급했기 때문이다. 우장춘은 을미사변에 연루되어 일본으로 도피한 일본 여성 나카(中 ()와 무인 우범선(武人 武範善)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범선이 암살된 후 우장춘은 어려운 처지에 놓였고 아버지의 옛 동지들의 도움으로 조선의 관비 유학생의 지원을 받게 되었다. 중학교 졸업 후 수학 성적이 우수했던 우창춘은 고등학교 졸업 후 교토제국대학 공과대학에 진학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학비 지원을 하는 조선총독부가 그에게 '도쿄 제국대학 농과대학'으로 진학할 것을 명령했고, 우장춘도 그 뒤를 따랐다.


만약 내가 제국으로부터 장학금을 받는다면, 나는 친일파인가?

우장춘의 삶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는 한국 사회의 관점에서 명성황후 암살에 가담한 아버지를 둔 친일파의 아들이다. 그는 당시 친일파였던 아버지의 전 동지들의 도움으로 정부 지원 유학생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농대 농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 제국 국립농업시험장 '코노스'와 다키이 주식회사 묘목농장에서 일본인을 위해 '농림 1호', '교토 3호' 등 개량 품종 무와 배추 등을 개발했다. 교토에서. 했다.


1950년 우장춘은 일본에 있는 모든 가족을 떠나 홀로 한국에 왔으며, 일본에서의 경험을 살려 한국식 무와 배추는 물론 만다린 오렌지, 무병 감자, 쌀 등을 개량하여 한국 농업의 기초를 닦았다. 우창춘은 1959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조국이 나를 알아주셨다"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정부는 우장춘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안익태 선생에 이어 두 번째 문화훈장을 수여했다.


정부 지원 유학 장학금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친일파인가요? 그렇다면, 한국 정부는 우장춘에게 주어지는 문화 훈장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교토제국대학의 정부출연 유학생들을 통해 이 문제를 조금 더 생각해 보자. 화학자 이태규는 북한 리승기와의 라이벌 관계에 거론되는 대표적인 남한 과학자이다. 이회창 전 총리의 숙부이기도 한 이태규는 히로시마 고등강사를 거쳐 교토제국대학 이학부 화학과를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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