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한 식민지 사업자본가를 낳다

 나는 한 소년의 전기에서 제국대학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대한제국 멸망 이듬해인 1911년 1월 5일 부산에서 15세 소년이 관용 여객선에 올랐다. "자신의 땅을 밟아도 전라도 곳곳을 여행할 수 있다"는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소년은 도쿄 게이오 기주쿠에서 유학 중이던 형을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현해탄의 겨울바람은 매서웠지만 소년은 밤바다의 파도 소리를 들으며 부풀어오른 꿈으로 감격했을 것이다.


15시간의 항해 후, 소년은 시모노세키에서 하선하여 도카이도 선으로 32시간 후에 도쿄에 도착했다. 소년은 훗날 기차에서 보이는 '연기구름을 여기저기 뿜어내는 높은 굴뚝'이 늘어선 오사카 공단의 풍경으로 일본에 대한 첫인상을 기억한다. 전라도의 단조로운 풍경에 익숙한 소년에게 오사카 공단의 굴뚝이 연기를 뿜어내는 모습은 '자본주의 문명'의 독창적인 체험으로 각인됐다.


그 후, 소년은 도쿄의 아사부 중학교와 교토 제3고등학교에 진학했고, 1921년에 한국 최초의 교토 제국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일본 유학 10년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형이 만든 경성방직의 제2대 사장이 되어 국경을 넘어 영등포 지역은 물론 만주 지역에도 방직공장을 확장했다. 결국, 그 소년은 제국의 공단인 오사카, 대륙의 중심인 베이징, 그리고 중국의 깊은 내륙에 사무실을 가진 황실 사업가로 성장한다. 이 소년은 경성방직의 김연수 사장이다.


형인 고려대 설립자 김성수가 가려졌지만 김연수는 명실상부한 식민지 시절 조선을 대표하는 기업인이었다. 그는 경성방직, 남만방적, 삼양으로 사업을 확장함으로써 한국 최초의 거대 재벌을 설립했다. 지금은 친숙한 '재벌'이란 말은 1932년 급성장한 고창 김씨 가업에 기자들이 붙인 이름이다. 김연수의 '경방'은 삼성과 현대, SK, 한화 등 창업자들이 막 창업할 때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한국 재벌의 원조였다.


경성방직품을 식민지 1위 기업으로 만든 성공한 사업가 김연수는 '한국적 기준'을 바탕으로 한 근대산업을 육성하는 것이 조선이 살 길이라고 생각했다. 김연수의 신념은 유학을 통한 근대적 경험에서 나왔고, 식민지 민족 부르주아 계급이 갖고 있는 사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식민지 체제의 이윤 추구 기업 경성방직이 식민지 정치, 일본 자본과 완전히 무관할 수는 없었다. 카터 제 에커트가 지적한 대로 국유기업을 표방한 '경성섬유'는 창업 초기부터 사실상 일본 주주들이 참여해왔다.


일본 총독이 식민지를 장악하였으나, 폭발적으로 확대된 일본 자본주의의 수요로 인해 일제에 협력한 식민지 자본가들에게 이윤 추구를 장려하고 다양한 특혜를 주었다. 이 정책은 또한 식민지를 계층으로 나누는 데 효과적이었다. 경성방직의 성공은 일본 자본주의의 급속한 확장과 식민지를 분할하고 통치하는 일본 총독의 대외적 요건의 영향이 컸다. 비록 우리가 때때로 국가를 홍보하는 마법에 대해 잊어버리지만, 모든 민족이 식민지 체제에서 억압받았던 것은 아니다.


당신은 국가 사업가입니까, 아니면 제국의 동료입니까?

하지만, 산업을 육성함으로써 조선을 근대화하겠다는 김연수의 첫 번째 약속을 의심하지 말자. 당시 유학생 그룹의 감정과 김연수의 초심을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 하나 있다. 아래 사진은 1917년경 도쿄에서 한국학생들의 모임을 마치고 찍은 사진이다.

가운데 깃발을 펼치고 서 있는 사람은 아사부의 중학생 김연수 씨다. 이 국기의 중앙에는 오늘날과 달리 태극 문양이 세로로 흔들리고 있으며, 8괘가 없다. 그리고 태극 문양 아래에는 "팬토"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8괘 대신에, '반도'를 뜻하는 한국어에서 번역된 영어는 태극 문양 아래에 놓였다. 유학생들은 태극이라는 대한제국의 상징과 '반도'라는 영토의 표기법을 결합해 국가 없는 민족공동체의 상징으로 활용했다.


근대화와 민족주의는 젊은 김연수의 세계 인식을 형성한 두 축이었다. 김연수의 숙부 김기중과 아버지 김경중은 한나라 말 고창 지역의 유력한 지주였다. 조선의 위대한 유학자 하서 김인후의 후손들은 난세 말기를 통해 메이지 일제를 조선의 발전 모델로 여겼던 계몽파의 목표에 공감했다. 그들은 1894년 일본의 지원으로 집권한 갑오개혁 정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애국 계몽운동에 발맞춰 당시 민족주의적이고 진보적인 사립학교에서 자녀들을 교육한 뒤 일본으로 보냈다.


그런 가정과 교육을 통해 성장한 성수 김씨, 연수 김씨 형제는 전시체제가 심화되는 1930년대 말까지 민족주의자라고 자신 있게 주장했다. 이들 형제의 사업은 민족주의와 근대화의 논리로 세워지고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중앙학교와 보성특수를 인수하여 발전시키고 경성방직과 동아일보 창간 등 교육·경제·언론 분야에서 국가의 미래를 위한 중앙 기관을 육성하려고 하였다. 김연수에게는 국가를 위한 산업 육성에 대한 소명의식도 있었다. 사업 측면에서는 형보다 재주가 있어 보이는 김연수가 식민지 정치의 영역에서 활약하는 형을 대신해 경성 직조 업무를 맡는다.


유학생 시절 '판토(반도)' 깃발을 들은 '태극소년' 김연수는 '경성섬유'를 운영하면서 민족주의의 아이콘을 사업의 상징으로 적극 활용했다. 광고 사진 속 여성은 '경성섬유'로 만든 '태극성'을 들고 있다. '싸고 질긴 면 태극성 면, 조선 1급 면'이라는 광고 슬로건과 함께 '태극' 무늬가 새겨진 '태극성'은 국가를 대표하는 상품으로 불린다.


그러나 단단한 직물의 직물은 일본 본토에서 생산되는 직물에 비해 품질이 떨어지고 값이 비쌌다. 설립 초기 경성방직은 서구 섬유산업을 일찌감치 따라잡은 값싸고 질 좋은 일본 섬유와 정면 승부를 벌일 수 없는 후발주자였다. 이때 경성섬유에 도움을 준 것이 '제품 장려 운동'이었다. '우리 집은 내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제품을 홍보하려는 움직임은 품질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조선사들이 생산한 지역산품을 활용하는 데 어필했다. 경성방직은 '제품홍보운동'의 민족주의적 호소력 덕분에 일본 자본과 함께 설립된 조선방직과의 경쟁에서 버틸 수 있었다.


해방 후 김연수는 '반민특위'에 수감돼 생활 속에 어두운 채로 남아 있는 전시체제, 기부금, 크레인 전쟁 청탁 등의 다양한 호칭 때문에 '반민특위'에 수감된다. 김연수는 무죄를 선고받지만 이 때의 판사의 논리가 흥미롭다. 법원은 김연수가 "선물로 국민정신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고 판결했다. 첫째는 '국수도' 경성방직업을 경영하고 일본 자본과 타협하지 않은 점, 셋째는 경방의 수도 표식인 각 주권은 무궁화 원 안에 태극기(중장일, 이호)를 모방하여 민족의 정신을 열렬히 상징하였고, 또한 태극기를 상표(J)로 삼았다.3번 웅장)은 경방에서 제작한 선전 포스터에 실려 있다. 하나의 사실 등 "4)"


법원이 제시한 무죄 판결의 근거는 국가와 제국 사이를 아우르는 김연수의 삶과 경성섬유라는 회사의 모호함과 복잡성을 잘 보여준다. 우선 최근까지 한국 경제사 연구에서 김연수의 경성방직은 일제의 협력과 보호 속에 조선, 만주, 중국 본토로 사업을 확장한 친일 자본이냐, 아니면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통해 성장한 국유기업의 성공담이냐. 적어도 김연수 본인도 사업을 이해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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